<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롭지 못함: 인간 됨의 노예적 성질>

2024. 5. 8. 04:35아주 특별한 일상-아주 평범한 걸작

인간의 마음은 주머니와 같고 빈 그릇과도 같다. 그래서 인간은 그것에 무언가를 담게 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마음에 뭔가를 담았다가 버리고 담았다가 버리고를 반복한다. 인간은 빈 마음, 곧 내면의 진공상태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무언가로 마음을 채우며 살고 또한 채워진 것을 토대로 살아간다. 채워진 것들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따라 산다. 그때 그것은 마음을 조정하는 키(방향타 rudder)가 된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무엇으로 마음을 채우는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에 채워지는 내용물은 저마다 관심사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부를, 어떤 사람은 성공을, 어떤 사람은 쾌락을, 어떤 사람은 권력을,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어떤 사람은 신을 추구하며 산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된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자기 인생이 된다.
 
그러한 관심사들 가운데서 최고의 관심사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궁극적 관심사’(ultimate concern)가 삶을 이끌어간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절대적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인생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삶에서 궁극적 관심사에 대한 비평적 성찰이 필요하다. 바르고 적절한 궁극적 관심사를 찾는 게 인생의 일차적인 탐구가 되어야 한다.
 
아무것에나 자기 마음을 주고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질지라도 궁극적인 것이 아닌 것을 궁극적 관심사로 삼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 시간이 지난 다음에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무언가에 붙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자신에게 가장 건전하고 유익하고 좋은 것에 붙잡히는 것이 현명하다.
 
사실, 인간의 근본적 특성 중 하나는 노예성, 곧 노예적 성질이다. 노예적이란 말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무언가에 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습관, 중독, 사상이나 이념, 종교와 같은 것들은 인간이 정신적 공백 상태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예시한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의 말은 상당히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 “인간은 모두 노예가 아니면 안 된다. 문제는 누구의 노예가 될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다. 만약 욕망의 노예라면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노예이고, 정신의 본원의 노예라면 오로지 신의 노예일 따름이다. 기왕이면 높은 주인을 가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인간은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자신을 종으로 내주게 되어 있다. 설사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더라도, 실제로는 취미라는 이름으로든, 기호라는 이름으로든, 애호가라는 이름으로든, 종교라는 이름으로든, 또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그 무엇인가에는 자신을 내준다. 그리고 그것과 자기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
 
따라서 기왕 무언가의 종이나 노예가 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인간 됨의 성질이라면, 톨스토이의 말처럼 높고 인자하고 우리 운명을 끝까지 책임져줄 주인을 가지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려면 자기 주인을 선택하기 전에 심사숙고하는 게 지혜롭고 그러한 숙고 뒤에 최고의 주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화, May 7, 2024: mhparkⒸ2024)